-◈생활속 심리학 ◈

[스크랩] 심리치료와 자신의 발견(꼭 한번은 읽어보셔야합니다)

우야씨의 일상 2008. 9. 18. 08:34

심리치료와 자신의 발견

                                                                     성신여대 김 정규 교수

심리문제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

심리학자나 정신과의사를 만나면 사람들은 자기 속을 들여다 볼 것 같아 조심스러워한다. 혹시나 자기를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까봐 불안해한다. 이런 태도는 한국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사람이나 유럽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처럼 심리문제에 대해 민감할까 ?

그것은 심리문제를 정신병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또 정신병은 정신이 이상해져 변질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리문제라고 해서 신체질병보다 더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심리문제도 신체질병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발생했다가 없어지는, 단지 우리에게 조금 불편한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문제는 밤에 이불을 제대로 안덮고 자는 바람에 감기에 걸린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열이 나고 한기가 나다가도 약먹고 며칠 푹 쉬고 나면 감기가 회복되는 것과 같이 심리적인 문제도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하거나 혹은 심리치료를 받고 한동안 안정을 취하면 곧 원래상태로 회복된다.

심리문제는 신체질병과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있으며, 문제가 있다해도 그다지 걱정할 일 이 못된다. 즉, 우리 모두 조금씩은 신체질환을 다 갖고 있지만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듯이 심리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신체와 마음에 대해 차별을 두는 데 있다. 즉, 길바닥에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친구와 대화 도중에 받은 상처를 그냥 무시하고 억누르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신체의 상처를 그냥 방치하면 곪아서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아픈 마음을 치료받지 않으면 점점 큰 병이 된다.


마음의 병이란 그렇게 거창한 것도 별난 것도 아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앓는 것도 아니다. 남들의 눈에 띄는 이상한 행동을 해야만 병이라고 볼 수 없다. 대부분의 우리가 간혹 한번씩 하는 생각, 간혹 갖게 되는 심정, 불쑥불쑥 드는 충동들, 그런 것들 속에 이미 마음의 병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드는 예들은 임상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환자들이 아닌, 평범한 우리의 친구들, 동료들의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라 우리는 그것들을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덮어버리고 산다. 물론 임상심리학자나 정신과의사들도 이런 것들을 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겨자씨를 겨자나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또한 아무도 겨자씨가 자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른도 안된 젊은 여성이 사는 것이 힘들다며 가끔가끔 드는 생각이 이제 죽어도 세상에 큰 미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 저 모든 것이 시들하고 재미가 없고 무언가를 꼭 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든다고 한다. 그런데 특별히 직장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도 아니고, 대인관계에 두드러진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직장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심리검사를 받아보아 도 정상수치에서 크게 벗어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어느 부분에선가 병의 조짐이 보인다. 꿈을 부풀리며 날마다 의욕에 찬 기쁜 마음으로 일할 나이에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녀 자 신도 자신이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된다. 무언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는 것은 막연히 느끼지만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대학생 딸이 허리디스크가 생겨서 어머니에게 병원비를 좀 달라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큰소리로 "사는대로 살다가 죽지"하고 고함을 질렀다. 딸이 깜짝놀라 쳐다보고, 어머니 자신도 놀라서 손을 입에다 갖다댄다. 돈이 그렇게 궁 한 것도 아니다. 남편이 애를 먹이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알뜰히 모은 돈으로 집 도 장만했고, 이제 조금씩 형편이 풀려나가는 중인데 왜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갑자기 맘에도 없는 소리를 질렀는지 스스로도 이 해가 안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얼굴에 수심이 생겼고 자기도 모르게 가끔씩 한숨을 쉬는 버릇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은 남자친구에게 요구를 잘 하던데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선뜻 어떤 요구를 잘 못하겠다. 혹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단념해버리고 상대가 해주기만 기다린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남자친구 중심으로 어떤 행동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요구는 잘하지 않게 된다. 어쩌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가도 그쪽에서 조금이라도 내켜하지 않으면 표정을 살피게 되고, 그런 자신이 때로는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왜 항상 자기는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지 이해가 안 간다. 어릴 때도 항상 오빠에게 양보했었는데 지금은 남자친구에게 늘 양보하는 자신이 속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관계를 끊을 수도 없을 것 같다.


동료가 내게 부당한 행동을 했는데 항의하고 싶어도 그에게 되려 당할 것 같은 생각에 말을 못하고 참자니 속만 상한다. 늘 당하기만 하고 자기주장을 마음대로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기도 하고 무력한 느낌이 든다. 그를 안 볼 수만 있다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매일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라 정말 속상한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으니 참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척 속상한다. 요즘은 밥맛도 없는 것 같고 자주 우울해진다.


남편이 너무 시집일에만 신경쓰는 것 같아 한마디 했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화가 났지만 어릴 때부터 화를 내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참았다. 그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속이 상해서 보름동안 서로 말을 안 했는데 결국 위장병 이 생겨 몇 달째 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낫지를 않는다. 남편과 생긴 일이라 자존심이 상해서 아무에게도 말을 안하다 보니 혼자서 쌓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는데 마음이 불안해지고 계속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괜히 트집잡게 되고,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화를 낸다. 이러다가 말겠지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어 릴 때 아버지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외도를 하여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던 생각이 떠올라 자기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 에 마음이 불안해진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생각하고 떨쳐버릴려고 해도 잘 안되고 자꾸 안절부절해지고 짜증만 났다.


이제까지 모범사원으로 매사에 깔끔하고 인정받으며 살아왔는데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막연히 불안해지고 소화가 잘 안되고 밤에 잠도 잘 안온다. 혼자 멍하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별히 일이 더 힘든 것도 아니고 동료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언지 모르지만 새로운 상사에 대한 느낌이 불편한 것 같다. 그에게 결재를 맡으러 갈 때 몸이 긴장되고 편하지가 않다. 상사가 특별히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좀 말이 없는 사람일 뿐인데, 괜히 자신감이 없어지고 제대로 내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하겠다. 그의 행동이나 인상이 어딘지 아버지를 연상케 하면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 을 통제하기 힘든다.


심리치료와 공감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조금만 신경쓰면 나을 것을 방치해두면 나중에 큰 병이 된다. 팔이 부러졌는데도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는 사람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든 것 같다. 하 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도 그냥 혼자 속으로 눌러두는 사람은 아직도 많은 것 같다.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심리치료자나 정신과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혹은 직장동료든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치료자가 되어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지만 그런 상처를 치료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직장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마음에 상처가 생겼는데도 어떤 이유에서든 더 이상 주변에 그런 상처를 달래줄 사람이 없을 때 발생한다. 가족이나 친구와 떨어져 살게 되었거나 혹은 어떤 계기로 인하여 주변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겨 아무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상처는 방치되고 병이 된다. 이때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심리치료자는 상처받은 마음을 잘 이해하고 감싸주 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치료자는 편파되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담자의 마음을 왜곡되지 않게 잘 이해할 수 있고, 전문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내담자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다.


심리치료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리치료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하고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와서 어머니에게 울면서 그 일을 이야기할 때 어머니는 잘 들어주고 나서 "그래 속상했겠다. 화가 많이 났겠어 !"라고 말해줌으로써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치료해줄 수 있다. 상사로부터 꾸중을 들은 직장인이 동료에게 하소연할 때 "그래요, 속상하실 것 같네요. 나라도 그런 말을 들었으면 정말 기분이 안좋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해줌으로써 동료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다.


심리치료란 한마디로 말해서 상대방의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마음을 그 가 느끼듯이 함께 느껴보고, 그렇게 느낀 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해줌으로써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이 타인에게 이해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타인에 의해서도 공유될 수 있다는 인식이 들도록 해주는 것이다.

공감받는 것이 어째서 치료효과가 있을까 ? 그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항상 자신의 존재를 타인과 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를 바로 이해받지 못한다 고 느낄 때이며, 거꾸로 상처를 치유받는 것은 나의 존재가 타인으로부터 바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고 느낄 때이다. 공감은 바로 상대방의 존재를 바로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치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상처받은 사건 자체보다는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표현한다. 상처받은 마음도 아프지만 그것을 치유해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 는 외로움이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때로는 나를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이 있어도 그들이 나의 깊은 상처를 이해해줄 능력이 없다는 생각에 더욱 외로움이 들기도 한다.

필자의 어떤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집안 일도 잘 도와주세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없게 잘 처리해나가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도 남편이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니까 그것이 항상 아쉽고.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어요."


심리치료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될 일이지만 막상 필요한 순간에는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상대를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 되레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덛붙여주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몇번 당하고 나면 타인에게 상처받은 마음 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위험스럽게 느껴져 마음을 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상대방의 감정을 그대로 이해해주고 느껴주고 되돌려주기만 하면 되는 공감이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심리치료 실습생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어렵다고 해서 그냥 포기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라면.


내면세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쉽지 않다. 상대방이 그토록 바라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나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의 마음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내마음을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만 해당되는 말인가 ? 아니면 자기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반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국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함을 당한 사람의 억울한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슷한 경험과 그때의 심정을 기억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상처들을 입게 되지만 성장환경과 상황에 따라서는 그 상처들을 치유받지 못하고 억압하고 덮어버리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치유받지 못한 마음의 부분들은 가리워져 본인 스스로에게 어두움으로 남는다 .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상처받은 마음이 있을 때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했듯이 상대에게도 그 상처를 이해해주기 보다는 덮어버리려고 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에게 새로운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치료해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치유받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좀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잘못 본거야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우리 자신의 지각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안보일 때는 눈을 흘기고 아버지가 보시는 앞에서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계모를 불신하는 것은 건강한 아이다. 비록 아이는 현재 계모로부터 구박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지각이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다. 자라서 이 다음에 나쁜 계모에게 복수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어렵지만 꿋꿋이 견뎌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비슷한 상황이 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벌어진다면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즉, 아이는 자신의 지각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기가 더 어렵다. 오빠와 차별대우하는 어머니에 대해 항의하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아이의 지각을 부 정해버리고,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내가 잘못 본걸 거야. 어머니가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 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지각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면 아이는 점점 자신의 지각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다. 이때 오빠와 차별대우를 받는 것도 상처가 되지만 자신의 지각에 대해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자신의 지각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부당한 대우에 대해 계 속 항의할 수 있고, 만일 그것이 받아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서만은 신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각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적전분열이 되어 행동목표를 상실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기반이 흔들리게 되며 결국 깊은 마음의 병이 된다.


한 여인이 갓난 아기를 업고 막 두돌이 되었을까 말까 한 아이를 걸려서 지하도를 올라온다. 양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가 들려 있다. 아이가 계단을 다 올라와 가지고는 갑자기 앞으로 폭 고꾸라지며 이마를 돌계단에 찧는다. 아이가 얼굴이 이지러지며 울려 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깜짝 놀라며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순간 아이 엄마가 고함을 지른다. "가만 놔두세요. 가 만 놔두세요. 혼자 내버려둬야 돼요 !" 아이가 어머니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듯 울지도 못하고 일어선다. 사람들이 속으로 혀를 차며 지나간다.


아이는 울고 싶지만 어머니가 받아주지 않으므로 울지 못한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마침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 속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상대가 자기에게 부당한 일을 해도 그것이 그의 잘못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어 뭐라고 말도 못한다. 심지어는 그런 일을 당해도 분노나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지각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한 내담자는 남자친구로부터 심한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상해서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묻는 말에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눈물은 왜 나오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원래 눈물이 많은데 혹 시 뇌기능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되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스스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속 "제가 좀더 친절하게 대했으면 남자 친구가 화를 안 내었을 텐데"라며 자기비난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몸이 약한데 직장까지 다니느라 힘들어 딸에게 자주 신경질을 내고 그녀의 감정은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자기에게 뭔가 잘못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왔다.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이 없어 타인이 자기를 싫어 할까봐 항상 남의 눈치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

남자친구에게도 그녀는 요즘 사람같지 않게 너무 잘해주는데 그런 그녀에게 습관이 된 남자친구는 처음에는 안 그러던 사람이 요즘에는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 화를 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불안해지고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것 같아 죄책감이 들고, 자신이 좀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비난

심리치료를 하다 보면 사람마다 갖고 오는 문제는 제각기 달라도 항상 거의 모든 대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현상이 하나 있다. 자기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상처받은 마음 위에다 자기비난을 통해 스스로 상처를 더해 고통을 겪는 내담자들을 볼 때마다 항상 안타까운 마음을 느낀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비난인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되지만, 그것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자기비난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한 내담자는 남편이 외도를 한 사실을 알고서 우울증 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이라며 자신을 비난했다.


자기비난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 순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가 빌미만 있으면 튀어 나와 자신의 머리를 방망이로 내리친다. 이러한 자기비난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대부분의 자기비난은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특히 부모로부터 들었던 말 혹은 대접들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것들이다.

예컨대, "너는 안돼 !" "돼먹지 않았어 !" "틀려먹었어 !" "안되겠어 !" "너는 어디에 가도 환영못받아 !" "못난 놈 !" "빌어먹을 놈 !" "너는 이기적이야." "넌 필요없어 !" "너는 도움이 안돼 !" "저리 비켜 !" "없어져버려 !" 같은 내면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이는 원래 외부의 목소리이지만 우리 속에 오래동안 인각되어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분인 것처럼 지각된다. 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영향으로서 평생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해로운 목소리로부터 우리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고 과감하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식별이 잘 안 된다.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 은 우리가 이 목소리와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내가 하는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자기비난이란 표현도 그렇게 해서 나온 말이다.

우리가 건강해질 수 있는 길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자기비난을 멈추는 일부터 시작된다. 마음이 어두워질 때는 대부분 자기비 난이 관계하고 있다. 따라서 그럴 때는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고서 자기비난을 찾아내어 몰아내야 한다.


자기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행동을 과거의 부모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건강한 성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비난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상황과 관계없이 자기에게 비판을 가한다. 반면에 건강한 성인의 시각은 자신의 행동을 공정하게 바라보고 바로 이해해주기 때문에 치료적이다. 바람피는 남편의 행동을 보고 자신 의 존재를 비판하는 것은 아직 과거의 부모시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바라보는 행동이다. 만일 건강한 성인의 시각에 서면 남편의 그러한 행동에 분노하는 자신의 감정을 당연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가학자와 피학자

자기비난은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는 행동이다. 내가 가학자이면서 동시에 피학자가 되는 비극적 행동이다. 내가 가학자가 되는 것은 나를 공격한 사람과 동일시함으로써 나타나는 행동이다. 이것은 모든 아이들이 위기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터 득하는 행동이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 하는 병적인 행동이다. 도마뱀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가듯이 자기비난은 성장과정에서 긍정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하지만 자기비난이 정도가 심하여 위기상황이 아닐 때조차도 자기에게 계속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은 병적인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병리로만 끝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로 연장되어 나타나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예컨대,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사람이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다시 자신의 아내나 자식을 학대한다. 그러면 자식은 다 시 자기 자신과 타인을 공격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들은 이러한 내면적 갈등이 외부로 옮아져 나타나는 것인 경우가 많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로 바뀌는 이러한 술레잡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들은 종종 놀랍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매맞는 어머니를 보고 가슴아파하며 어머니 곁에서 함께 울던 아이인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불쌍해 울면서 아버지를 미워하던 그 아이가 어째서 성인이 된 지금 자신의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때리고 학대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 나중에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책하면서도 다음에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지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 자신의 감정과 의지에 반하는 그런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안나 프로이드는 이를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우리 마음 속에 우리를 학대하던 사람이 동일시에 의 해 그대로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요컨대, 아내와 자식을 학대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ᄍ아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는 자기를 학대하는 아버지의 위치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자신을 학대하고, 동시에 자신의 그러한 약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다른 사람들, 예컨대 아내와 자식, 부하직원들을 학대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그 사람이 학대하는 대상은 심리적으로 볼 때 자기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의 입장에 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 대답은 간단하다. 잃어버린 자기를 도로 찾는 것이다. 짓밟히고 외면당한 자기, 버려지고 소외당했던 자기, 어린 자기를 만나서 도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자기를 만나러 갈 때는 조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아버지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 아이를 짓밟고 상처만 주게 된다. 건강한 어른의 이성 과 따뜻한 가슴으로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며 그 슬픔과 외로움을 발견하고 따뜻하게 받아주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처음에 당신의 그러한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경계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이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따뜻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니 ? 그리 고 슬프고 무서웠겠니 ?"라고. 그 말을 듣는 아이는 혹시 화를 낼지도 모른다. "지금껏 어디 있다 이제 왔어 ?" 라고. "당신 없어도 나 혼자 살 수 있어. 필요없어. 가 !" 라고 울면서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이라 면 아이의 그런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래 ! 그래 ! 네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어 ! 정말 미안해. 내가 너를 오랫동안 외면해왔구나 ! 너를 내가 버렸던거야 !" 라고 말하며 함께 울면서 아이를 꼭 안아줄 것이다. 나 자신속에 있는 어린 아이, 나의 참모습, 나의 존재를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이것이 심리치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한번만에 끝나지 않는 두고두고 다시 해 야 되는 자기회복의 길이다. 이렇게 치료가 되면 아내를 바라보는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바뀐다. 자신을 받아들 인 것과 똑같이 아내와 자식 그리고 부하직원을 받아들이고 화해하게 된다.

편의상 남자의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정신역동은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어머니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한 여자 아이가 어머니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학대하게 되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 남편이나 딸, 아들, 직장동 료나 후배를 학대하는 정신역동이 일어난다.


내면의 아이

우리 속에는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형제들로부터 그리고 친척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상처받고도 치유되지 않아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나는 것은 바로 상처받은 내면 의 아이 때문이다. 치유가 된 상처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도 눈물이 나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치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울고 나면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미처 못다울었거나 아예 울지도 못했을 때 그것은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남 아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았던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매우 건강하다. 그것 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아이가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마음의 병은 아파도 울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아이가 울지 못하는 것은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우는 것을 못참는 사람들이 있다. 울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거나 아니면 아이의 주의를 얼른 딴 데로 돌려 울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울지 못한 내면의 아이를 갖고 있다. 아이가 울면 자신의 해결되지 못한 고통스런 과거 어린시절 기억과 슬픔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기 위해 아이의 울음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부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아이가 우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울어도 아무도 받아주고 달래줄 사람이 없었다는 무의식적 기억 이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상처를 달래주고 받아줄 사람이 없었을 때 울음을 참고 누르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더욱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내가 슬픈 마음일 때 친구에게 혹은 남편에게 털어놓으면 이해받고 수용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치료받지 못한 내면의 아이 때문이다. 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감정을 아무도 안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울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이런 울지 못한 아이가 있다.


우리 내면의 아이를 치유받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그것은 이 아이를 충분히 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어떻게 ? 아이를 받아줌으로써 ! 아이는 사실은 울고 싶지만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참아온 것이다. 우리가 아이의 슬픔에 귀기울이고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것을 받아줄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주고 받아주면 자신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심리치료를 받는 동안 일어나는 변화는 이런 것들이다. 처음에 내담자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면의 아이를 외면하려고 한다. 치료자의 공감을 받으면서 차츰 마음 문을 열면서 자신의 내면의 아이를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편해진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수용하게 되니까 타인의 내면세계에 대해서도 수용적이 되어 서로 편한 관계가 된다.

우리 내면의 아이에게 성숙한 어른의 입장에서 가끔 편지를 써보는 것이 자기치료를 위해 좋은 방법이다. 이는 상처받은 자신 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작업이 된다. 자신의 살아온 과정들을 회고하면서 아이의 대견스러운 모습들과 행동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편지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동안의 외로움을 치료해주는 약이 된다. 어느 날 더 이상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지 않게 되고, 우는 아이를 따뜻하게 받아주고 달래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수용

평가를 그만두라

자기를 칭찬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왜 화가 나는지 물어보면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잘하지 못하는데 칭찬하는 것은 놀리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장점을 이 야기해 주면 궂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해서 그런가 싶어 다시 말해주어도 자기를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부정한 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이런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평가에 매우 민감하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 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기다리던 좋은 피이드백이 오면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

그것은 그들이 부정적인 자기평가를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개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내면의 목소리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항상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지 모른 채, 시지프스처럼 또다시 높은 산을 향해 돌을 굴려갈뿐이다.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으면 아무리 외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내면의 목소리를 중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이성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아무 리 상처받고 고통받아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이성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은 마치 봄비를 맞은 겨울 풀들이 소생하듯이 다시 희망을 갖고 내일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다. 이 이성의 소리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일뿐이다. 장미는 장미일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떤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달라지는 건 없다. 타인의 평가 때문에 나에 대한 나의 생각이 일시적으로 달라질 수는 있을지라도 근원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랑캐꽃을 좋아하고 파란 하늘 흰구름을 즐겨 쳐다보는 나, 바로 그런 나는 타인의 비교평가에 의해 달라지지 않는다. 담벼락 에 핀 줄장미 꽃을 발견하고 반가와하는 나, 저녁하늘 석양을 바라보며 감동에 젖는 나, 그 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나, 바로 그 나다.

나는 그 나를 사랑한다. 내 모습그대로의 나, 나는 그 나를 사랑한다. 내가 바뀌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잘못이다. 나는 나일뿐이다. 장미는 장미일 뿐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다. 나는 나일 뿐이다. 오랑캐꽃을 좋아하는 나, 파란 하늘 흰구름을 좋아하는 나, 나는 바로 그런 나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한다.

나는 온전하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이다. 내가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부당하게 평가한 부모나 사회의 영향을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의 앞으로의 과제는 그런 잘못된 영향들을 나 밖으로 몰아내고 원래의 순진무구함 그대로의 나를 되찾아 행복해지는 것이다.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어요 ?

필자의 한 내담자는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사람인데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잘 안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지 물었더니 놀랍게도 하는 말이 "누가 내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겠어요 ?"라고 반문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들어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늘 자기에게 힘든 하소연을 많이 했는데 항상 듣기가 지겨웠지만 싫단 말을 못했 고 한다. 가족의 이야긴데도 듣기가 지겨웠는데 남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 주겠는냐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projection)'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그녀는 이야기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도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는 이 도식이 사실을 잘 반영해주었다고 하겠는데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안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다. 그녀의 어머니는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딸에게 하소연하기만 했지 반대로 딸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안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더욱 쉽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어머니가 자기를 안 받아주었는데 누가 자기를 받아주겠느냐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자신의 과거경험을 현재에 적용시킨 투사라고 하겠다.

한편, 이 내담자가 실제로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고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지 검증을 해보면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다 그렇지만 이 내담자도 현실검증을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런 시도가 매우 위험하게 느껴져서 이를 적극 회피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에서 그녀를 잘 받아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사람들이 분명히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고 잘 받아주는데도 그녀는 그것이 받아주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순간 에 그녀는 마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오래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머니에게 다가갔을 때 어머니가 눈쌀을 찌푸리며 밀쳐내던 장면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누가 나를 받아주겠어요 ?"라는 말을 매번 만날 때마다 되풀이하는 것이다.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의 정체가 무얼까 ? 그녀의 어머니일까 ?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 많이 달라지셨다. 그러면 왜 아직도 그녀가 고통을 겪고 있을까 ? 과거의 그녀의 어머니가 원인일까 ? 그것도 아니다. 과거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지금 괴롭히고 있을까 ? 그것은 그녀 자신이다. 과거의 어머니를 마음 속에 보관하고서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자기 자신이다. 즉,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너는 귀찮은 존재다. 너를 받아줄 수 없어. 나는 피곤해 !"라는 말을 들려주고 있다. 오래된 필름을 계속계속 돌리면서 자기를 현재와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자신이다.

해결책은 그녀가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을 멈추고 성숙한 어른의 시각으로 자기자 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자기가 받아들 일 수 없는 존재인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어머니의 시각이 아닌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사랑스런 아이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동자와 그 아이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은 욕구들 이 그대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받아주지 못한 어머니가 안타까웁지 아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들 수가 없다. 그러면서 사랑받지 못해 외로왔던 아이를 쳐다보며 한없이 애처로운 생각이 들며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필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아이를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무슨 말을 해보라고 제안했더니 그녀는 "얘야 ! 참 힘들었겠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왔었니 ? 그동안 너의 존재를 내가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 같애. 미안해 !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내가 잘못했어. 네가 뭘 할 수 있었겠니 ? 그저 외롭고 힘들고 그래도 아무도 안알아주고 버려진 존재였지 ! 그런데 있잖아 ! 내가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 ! 너는 사랑스러운 존재야. 비록 어머니가 너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넌 정말 사랑스런 존재야 ! 이제부터 내가 너를 받아줄께! "


자신이 막고 있는 것만 거두어들이면 세상은 열려져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보내고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막고 있기 때문에 못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우리는 타인들로부터 어릴 때 받았던 거부 같은 것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증오와 미움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때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는 사랑의 힘이 더 강하게 받치고 있기 때문에 장애를 넘어서 우리의 사랑의 힘이 서로 전해지고 통해진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해야될 일은 먼저 스스로 막고 있는 나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봇물처럼 사랑의 에너지들이 밀려들어오고 또한 나의 내면의 창조적 에너지가 밖으로 뿜어져 나올 것이다.

타인이 내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막연한 이야기도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다. 예컨대, 타인이 나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은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 것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거부한 것이다 . 이제 내가 나를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이 내게 들어와 친구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남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 ?

내가 나를 막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도 남이 어떻게 볼까봐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 나 많았는가 ? 길가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어깨 춤을 추고 싶었지만 남이 어떻게 볼까봐 내가 나를 가로막지 않았던가 ? 때로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 심정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봐 나를 가로막지 않았던가 ? 때로는 친구를 만나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울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봐 나를 막지 않았던가 ? 결국은 아무 것도 못하고 허전하고 공허한 가슴만 안고 밤거리를 헤매어 다니지 않았던가 ?


우리의 불행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도 전에 매번 좌절당하는 데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나를 좌절시키는 것이 다.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

"행동에 옮기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 ! 남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여기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타인이 비웃을 거라는 나의 생각이다. 사실 타인은 그렇게 나쁘게 안 볼 수도 있다. 설령 염려한대로 좀 나쁘게 보는 타인이 있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안된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실제 타인의 생각보다는 타인이 나쁘게 볼 것이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두려움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 움은 각 개인이 과거에 겪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과거에 중요한 타인(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아프게 거부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두려움이 더 크고 따라서 타인을 의식해서 자기를 제지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지금 나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타인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 "타 인의 시각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 "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할 때는 타인의 시각이 아닌 나의 욕구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타인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나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타인 이 내가 익숙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무조건 내 시각에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말고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 하고 싶으냐 하고 싶지 않으냐가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볼 것 같으냐에 맞추어 하다보면 나는 없어지고 타인만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생각하는 타인'만이 남게 된다. 즉, 사람은 없어지고 관 념만이 남아 나를 지배하게 된다. 그것이 실존적 공허이고, 우리 불행의 본질이다.


대인관계 

사람들에게 못 다가가겠어요

필자의 한 내담자는 사람들에게 잘 못다가가겠다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완전해야 상대가 나를 받아들일 것 같아요 ! 그런데 나는 너무 허술한 데가 많아서 안 받아들여질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오히려 허 술한 데가 있어야 사람들이 더 편해하지 너무 완전하면 불편하게 느낄 것 같다라는 말을 해주어도 그녀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되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완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이 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 리가 받아온 교육도 그렇고 사회제도도 그렇고 우리가 완전해져야만 인정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고, 실제 그런 척도에 의해 우리의 존재가 날마다 평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완전해지는 어느 날,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누구로부터 완전한 인정을 받게 되는 날 환상적인 행복에 도달할 것이라는 꿈을 좇아 끝없이 허덕이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노새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그렇게 허덕이는 존재가 되었을까 ? 그것은 어떤 절대 행복이 저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했 던 그리고 가능했던 최소한의 행복이 유보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그렇게 목말라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그러한 행복을 주지 못한 사람들(부모나 사회)이 그 이유를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이 란 "네가 조금만 더 착한 아이가 되어준다면, 조금만 덜 애를 먹인다면, 조금만 더 조용히 앉아 있는다면, 조금만 덜 징징 댄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한다면 등등등, 언젠가는 내가 너를 사랑해줄께. 내말 믿어 !"와 같은 말들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판단력이 전혀없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이런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깊이 깊이 뇌리에 박혀있어 이를 의심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상처를 입을 때 얼른 먼 저 드는 생각이 "아 ! 내가 잘못했겠구나. 내가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상대가 내게 그러지 않았을 텐데 !"라는 말이다. 그것은 명확히 상대가 잘못한 경우조차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내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서워지는 것이 다. 내가 완전해야 한다는 신화가 깨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나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새디스트드로만 지각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여린 가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누구나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잘못 가르친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두려움에 휩싸인 채 힘들게 살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차갑게 대한 것도 자기자신도 사랑에 목말라 허덕이면서 채워지지 않은 갈증에서, 끝없는 절망에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아이들을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 언젠가 내가 완전해지면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헉헉대며 나를 계속 몰아부칠 것인가 ?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 갈 수는 없다. 이제 방향을 돌아서야 한다. 우리가 모두 한 배에 탄 공동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무엇을 더 기다릴 것인가 ?

내가 완전해진 다음 사람들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부족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내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이다. 무엇이 벌어지는가를. 사람들이 나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는 순간 나은 느낄 것이다.

"여기에 삶이 있구나 ! 바로 지금여기에 !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들, 언젠가는 만나겠지 ! 언젠가는 ! 하고 목말라 그리워했던 것들이 지금여기에 다 와 있구나 ! 그토록 그리던 따스한 미소, 따스한 눈빛들, 그것들이 지금여기에 다 와있구나 !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 아무 준비도 없이 왔는데도, 나를 기뻐해주는구나 ! 그냥 내 존재를 기뻐해주는구나 ! " 하고.




거절을 못하겠어요

친구가 전화를 하면 한두시간씩 전화를 상대해주어야 하는 데 그것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이제 그만 끊자는 말을 잘못한다고 한 다. 그러니 더욱 지겨워지고 이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으며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왜 적절한 순간 에 대화를 중단하지 못하는지 물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 그러면 친구가 자기를 싫어할 것이 뻔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녀에게 가까운 사람의 의미는 싫어도 받아주고 참아주어야 하는 관계로 개념형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유지되는 그런 관계다. 그녀에게는 자기가 힘든 일을 털어놓고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그런 의미에서의 가까운 사람 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이란 오히려 부담만 주는 관계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게 살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된다.

정말 친한 관계라면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은 관계인데,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그런 것이 히말라야 산속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상상하기 힘든 것만큼이나 이해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머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해서 배운 것은 저절로 이해가 되지만 설명을 통해 들은 것은 돌아서면 아리숭해진다.


그런데 거절을 잘못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다. 이는 우리 문화의 영향이기도 하다. 거절하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 를 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복수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 거절을 않거나 말끝을 흐려 확답을 안하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그런데 필요한 순간에 거절을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앞의 내담자 예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상대방의 심한 행동에 대해 내가 거절을 못하면 내가 많은 고통 을 겪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좋지 못할 수 있다. 내가 힘든다는 말을 안했기 때문에 상대방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힘들다는 말을 했으면 충분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데 이쪽에서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면 자기도 모르게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정말 염치가 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쪽에서 힘들다는 말을 했으면 염치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뻔 했는데, 그 사람에게 좋은 학습의 기회를 박탈한 셈이 되어버렸다. 어느 모로 보나 적절한 자기표현은 모두에게 도 움이 되었을 것이다.



부탁은 그쪽 일, 거절은 내쪽 일

"아니 그 사람 내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다 할 수 있어 ? " 하고 흥분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을 한 사람에게 화가 나서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말이다. 그 사람이 어떤 부탁을 하던 내가 못 들어줄만 하면 안 들어주면 되는 것이지 화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 그것은 그가 나로 하여금 거절해야되는 입장에 처하게 만든 것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화가 날까 ? 그것은 내가 거절하면 상대가 나에게 화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화가나는 것은 이처럼 생각이 두단계를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상대는 단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일 뿐이고 나는 거기에 대해 있다 없다라는 대답만 해주면 그만이다. 이때 상대가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물러서든 아니면 자기입장에서 생각해 섭섭해하든 그것은 상대의 문제이다. 즉, 상대가 성숙한 사람이냐 미성숙한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 것은 그 사람이 책임져야할 몫이다.

이때 나의 몫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내가 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한 사람이 원망스러워서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내가 거절을 잘 못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화 가 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책임져야할 문제다. 그런데도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문제를 상대에게 책임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

내가 노우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싫어할까 ?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우를 잘 못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노우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심지어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왜냐하면 그 런 사람은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고 따라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우를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상대방에게 더 신경쓰고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그래서 노우를 잘못하는 사람을 은연중에 경멸한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함부로 대해도 그런 사람은 항의도 잘 하지 못한다. 항의는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상대의 행위에 대해 노우하는 것인데, 평범한 노우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과감한 노우를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여성들의 경우에 노우는 특히 중요하다.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순종적인 교육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상대방에게 노우라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우는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 노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내 허락없이는 못들어옵니다"라는 경계표시가 노우이다.

노우가 분명할 때 예스가 정말 예스가 된다. 그것은 노우가 분명해짐으로써 내가 분명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짐으로써 그 사람이 예스를 할 때 그 예스를 책임지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우가 분명하지 않을 때 내가 누구인지 주체가 불분명해지고, 그런 사람이 하는 예스는 책임질 주체가 불분명하므로 정말 예스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면 노우는 많이 할수록 좋은가 ? 그렇지 않다. 무조건 예스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 못지 않게 무조건 노우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아버지가 권위적이어서 싫었기 때문에 나이든 남자들만 보면 무조건 반발심을 가졌다. 그래서 상대방이 하는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거나 때로는 쏘아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위축되고 오 금을 잘 펴지를 못했다. 그녀의 노우는 예스가 없는 노우로서 자기 울타리를 지나치게 많이 침으로써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만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영역표시가 아니라 타인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들이 그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결국 자신과 이성의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것이다.

노우는 필요한 곳에 노우라야 한다. 무조건 노우는 노우의 진정한 목적과 효용을 상실해버린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 한 요구나 힘겨운 부탁에 대해 자신의 내적 현실을 알리는 노우라야 한다. "다른 때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좀 힘들어요. "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몰라도 매일 도와드리는 것은 부담스러워요 !"라는 식의 노우라야 노우의 진정한 의미 가 드러난다.


진짜 노우와 가짜 노우, 진짜 예스와 가자 예스


정말 싫어서 노우하는 것이 진짜 노우이고, 사실은 좋지만 노우라고 말하는 것이 가짜 노우다. 후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가짜 노우도 쓸모가 있다. 하지만 자주 그리고 언제나 가짜 노우가 나오면 코뮤니케이션에 혼란을 가져다준다. 전자는 내숭이라고 봐주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왜 그렇게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피이드백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말 좋아서 예스하는 것이 진짜 예스고, 사실은 싫지만 거절을 못해서 예스하는 것이 가짜 예스이다. 여기서도 후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벼운 경우에는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어머니 때문에 한 내담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사실은 자기는 수녀원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너무나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 에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결혼했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느라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고 결혼이 몇번씩이나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몇번씩이나 있었지만 그것도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냥 눌러 살았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의 기대에 대해 노우를 못해 결혼했고, 어머니의 기대 때문에 자신의 파산한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노우를 못한 것이다.


이해에 대하여

인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해다.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이해함으로써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고,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면 우선 내 마음이 편하다. 사람들 중에는 상대방의 행동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늘 왜곡해서 지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선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 상대방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혹은 그런 의미로 한 행동이 아닌데 혼자 괜히 지나친 상상을 하여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만들어 마음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이해를 잘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줌으로써 상대방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 드문 세상에 이는 값진 이타적 행동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해는 타인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 는 사람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고 호감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므로 이해는 서로간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이해를 사람들은 왜 하지 않을까 ?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받아본 경험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서로 이해해주고 이해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거나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해보려고 해도 어떻게 하는지를 잘 몰라서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썩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이해가 무엇인지 들어서 알고 있고 적게 많게 체험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얼까 ?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과거의 영향이란 자신이 과거에 겪은 일들이 현재에 투사되어 나타남으로써 상대방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릴 때 계모 밑에서 자라며 무시를 많이 당한 사람은 상대방이 별뜻없이 하는 말 을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잘못된 생각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 두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상대방을 이해해주면 내생각이 틀리게 되기 때문에 이해해주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종종 부부싸움이 끝이 안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상대방을 이해해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맞다고 동의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이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려주고 알아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경험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해는 내가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을 취해봄으로써 그의 심정을 이해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은 그의 생각이나 주장을 맞다고 동의해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내 생각과 나의 심정을 포기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해보면 누구나 그 효과를 금방 발견하 게 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아니라 상대가 나의 마음(심정)을 알아주느냐 주지 않느냐이다. 상대가 최소한 내 심정을 이해해주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 느껴도 우리 마음은 금방 누그러든다.

또 다른 잘못된 생각은 상대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데 내가 왜 상대를 이해해주어야 하느냐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해란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그런 물건같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좀더 많이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손해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해는 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모로 이익을 보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기에게도 편하고 상대에게도 좋고 서로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 그뿐만 아니다. 이해의 진정한 가치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이해를 함으로써 나의 보는 시각이 넓고 깊어진다. 이해를 못할 때 는 내 입장만 알았지만 이해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까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만 볼 때는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해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존재가 보인다. 즉,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어떤 심정인지가 보이게 된다.

한편, 이런 이해와 관련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한가지 있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 문화권에서는 서구문화권에 비해 이해의 가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훨씬 높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 같다. 이것은 참 좋은 전통인 것 같다. 필자가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 중에 하나가 그들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이해노력이 우리 문화권에 비해 훨씬 부족하고 또한 그에 대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미부여도 적다는 것이었다. 이점은 서구문화에서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가끔 이해에 대한 가치부여가 지나친 나머지 윤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하여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생긴 힘든 문제를 윗사람에게 혹은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 흔히 듣는 말이 "네 가 이해해라 !"라는 윤리적 충고 내지는 압력의 말이다. 이때 윗사람이 말하는 이해는 도덕적 명령이다. 이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어떤 압력에 의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내가 나의 문제가 많이 해결된 시점에서 성숙한 어른의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행동이다. 그것이 진정한 이해이고 또한 가치있는 이해이다.

그런데 "네가 이해해라 !"는 말은 대개 아직도 그런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충고조로 하는 말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듣는 사람의 반발을 살 수도 있고 설령 그 충고를 좇아서 억지로 이해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자칫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무시하고 억지로 상대를 이해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어 인격이 통합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은 외면한 채 상대방을 이해하는 쪽으로만 치달아 오히려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사람들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오해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나 오해를 받았을 때 마음이 상한다.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 혹은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속이 상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속상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확고한 마음이 있으면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이 문제가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해 때문에 심하게 속이 상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냐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상대의 평가에 의해 나의 행복이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나자신 뿐이다.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된다. 나 스스로 나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면 설령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더라도 별로 큰 문제가 안된 다. 내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오해가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자신감이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의 나에 대한 평가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정당하게 평가하고 신뢰하고 그 믿음 위에 흔들리지 않게 서 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나를 오해할 때 마음 속에 심한 갈등이 일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판단할 때 문제는 풀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다른 사람과 오해가 생겼을 때는 그 사람에게 가서 해명하거나 안되면 따지기라도 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나를 오해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런 오해는 내 속에 은밀히 숨어서 평생을 따라 다니며 시시각각으로 나를 괴롭힌다.

자신에 대한 오해 중에 가장 자주 일어나는 것은 자신을 부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앓는 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오해하는 문제와 관련있다. 예컨대, 타인들이 보기에 매우 따뜻한 사람인데 자신은 자기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타인이 보기에 매우 유능한 사람인데 자신은 자기를 무능하다고 보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미인인데 자신은 못생겼다고 고민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등은 모두 자신을 오해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올바른 대인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로 인해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 이들은 언제부터 자신에 대해 이런 오해를 가지게 되었을까 ? 이들의 오해는 우연히 자기혼자서 갖게 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관계에서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런 오해를 배우게 된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아이들의 실수를 어른들이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아이의 잘못으로 꾸짓는다거나, 그 자체로 한없이 사랑스런 존재인 아 이에 대해 단지 아이들이 많다거나 경제적 여건 혹은 부모의 개인적 사정으로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거부하게 되고, 그것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한 자신에 대한 오해는 지속되고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바꿀 수 있다. 어른의 시각으로 다시 냉철하게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바로 봄으로써 자신의 생각 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무도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 다가 가보라.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상대편이 반갑게 맞아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과 성, 결혼

사랑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사랑이다. 삶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삶의 행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그리고 늙어서 노인이 되기까지 한 순간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사랑이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하다. 그것이 안될 때 우리는 슬프고 허전하고 외롭고 마침내 절망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너무나 적은 것이 사랑인 것같다.

어딜 가도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곳곳에 오해와 미움과 질투가 도사리고 있지 정말 우리가 받고 싶은 포근하고 따스한 조건없는 사랑은 무척 드문 것 같다. 왜 그럴까 ? 애당초 우리들 속에 사랑이 적기 때문에 그럴까 ? 아니면 사랑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갖고 있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얻기 위해서 경쟁하고, 결국 몇 사람만 사랑을 받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받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진실인가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가슴속에 사랑을 가득갖고 태어난다. 흔히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 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은 사랑을 가득안고 이 세상 에 태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를 조금만 이뻐해주어도 아이는 너무나 행복해하며, "엄마 사랑해 ! 아빠두 사랑해 !"라고 말하며 목을 부둥켜안고 뽀뽀를 하며 부모에게 열배 스무배를 되돌려 준다. 아이들은 참으로 부자다. 부모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자기감정에 못 이겨 아이를 때리고 미워해도 아이들은 그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부모를 용서해준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부모에게 사랑을 선물한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사랑이 그렇게 없을까 ?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숱한 상처를 입으면서 차츰 마음문을 닫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것만큼 아픈 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상처를 치료받지도 못한 채 거듭거듭 상처를 받다보면 우리는 점점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그래서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문을 닫게 되고 그러다보니 저마다 아픈 가슴들을 혼자 쓸어담아 안고 외롭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에는 사랑이 점점 없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찬바람 만 쓸쓸하게 불고 지나가는 것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직도 세파에 덜 시달린, 그래서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목마른 갈증을 풀려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 사랑이 메말라버렸을까 ? 이 세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 나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사랑이 가득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한없이 용솟음쳐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집단심리치료를 통해 그런 체험을 수 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마치 화산 속 의 뜨거운 용암같은 사랑의 에너지가 항상 끓고 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깥부분이 바위와 흙으로 감싸져 있어 다만 사람들에게 안보일뿐 용암은 뜨겁게 끓고 있다. 어쩌면 표면의 껍질들이 속의 용암을 잘 보호해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 가 이 뜨거운 용암의 일부분만이라도 밖으로 뿜어낼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해질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조그만 화산들을 다 갖고 있다. 그것을 부지갱이로 쑤셔서 조금만 밖으로 끄집어내면 따스한 화롯불이 될 수 있는데도 그것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다. 즉, 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만 그것이 거부당할까봐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묻어버리고 덮어버리고 살자고 마음먹어버린다. 외롭고 슬프지만 그래도 그것이 아픈 것보다는 나으니까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렇게 마음먹고 단념하고 살고 있는데... 아무 생각없이, 아무 기대없이 살고 있는데, 잊고 살다보니 그런대로 그런 삶에 익숙해져 이렇게 살아도 되겠구나 나름대로 편하다고도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누가 당신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해온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처음엔 "이게 무언가 ? 내가 잘못 본거겠지."하고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한 걸음 더 다가와서 애정을 표현한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당황되고 어찌할 바를 모를른지 모른다. 아마 계면쩍어 외면하는 몸짓 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아직도 당신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좀 짜증이 나고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갑자기 퉁명스럽게 상대를 쏘아주거나 아니면 더 심하게 노골적으로 상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 당신은 사랑이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당신은 상대방의 애정표현에 무언가 위협을 느끼고 그런 반응을 했 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그들을 놀라게 만든다. 사랑은 그들의 억눌렸던 슬픔과 고통,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있던 상태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익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편했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편안한 마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므로 무섭게 느껴진다. 상대방의 애정이 자기가 지금껏 쌓아온 벽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불란서 마르세이유 항 앞바다의 섬에 있는 샤토디프라는 중세시대의 감옥이 있다. 이 감옥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악명이 나있는 곳이다. 이 감옥에서 50년간 감옥살이를 해온 사람에게 어느 날 감옥문을 열어주었을 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놀라 기절할지도 모른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닥친 자유야말로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사랑이었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놀라고 당황하고 그래서 화를 내며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살아왔고 사랑없이 사는 삶에 너무나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토록 그리던 것 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 동안 주어질지 의심이 가고 또한 내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도 자신이 안서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되돌려주어야 할지 도대체 상상이 안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며 그의 애정을 거 부하는 것이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에요 ? 나를 놀리는 거에요 ? 당신이 책임질 거에요 ? 나에게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도 잘 모르지만 내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애. 그것을 가만히 덮어두어야지, 잘못 건드리면 내가 폭발할 것 같애. 슬픔, 분노, 적개심, 사랑받고 싶은 마음... 무어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들을 가만히 덮어두어야지 잘못 건드리면 내가 이제까지 애써 쌓아온 벽이 허물어지고 내가 주저앉을 것 같애. 제발 가까이 오지마 ! 난 지 금 무서워. 당신에게 화를 낼까봐. 아니야, 그것보다 내가 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래. 제발 가까이 오지마 !"


우리는 타인이 이런 반응을 보일꺼라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다가서기가 주저된다. 이는 서로서로 마찬가지이므로 결국은 사람들 사이에 마음 문은 점점 더 닫히게 되는 것이다. 서로 마음 다치지 않으려고 서로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심지어는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사실은 남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솔직히 내보이고 싶지만 남편으로부터 거부당할까봐 말을 안하고, 기껏 "왜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없느냐 ? 사랑해주지 않느냐 ?" 는 식으로 항의하는 말로 대신한다. 남자의 경우 는 이런 어려움이 훨씬 더 많다. 남자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욕구를 부정한다. 그래서 애써 강한 척 태연한 척해야 되는 남자들의 운명은 여자들보다 이 부분에 있어 훨씬 더 비극적이다.

남자들의 애정욕구는 거의 대부분 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지" 하는 식, 아니면 "당신은 다른 여자들처럼 좀 상냥할 수 없어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자신의 욕구마저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 모두 가까운 부부사이에서조차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식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주기보다는 받기만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다. 즉, 사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는 것 에 비해 훨씬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부담스러우면 피하거나 거부해버릴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가 거 부당할 수 있고 그것은 매우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주는 것은 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 사랑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주는 것은 더더욱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 속에 끓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우리 모두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를 정말 원하고 있지 않는가 ? 그 일을 위해 서는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생기면 의외로 많은 용기를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에서부터 그리고 가까운 친구사이에서 얼마든지 실험의 장이 열려있다. 사랑이 다시 넘쳐나는 세상을 위하여.


성에 대하여

처녀가 아닌데 어떻게 하지요 ? 나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나요 ?

내담자들에게서 가끔 듣는 질문이다. 옛날 사귀던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는데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이해가 된 다. 아직도 한국 남자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걱정 이 드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여성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다. 남자들의 시각 에 자신을 맞추려다 보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여성 스스로 확고한 가치가 정립되어 있으면 남자들이 거기에 맞추어 가치관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여성의 문제를 남자들의 가치관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무엇일까 ? 여성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 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사고가 요구된다. 이러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필자의 견해가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처녀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즉, 성은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럽혀 질 수 있고, 더럽혀진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녀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은 물질적인 것일 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성이란 우리 신체의 일부분에 국한되어 존재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처녀막에다 의미를 두기도 하 지만 처녀막에 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녀막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들 이 일단 성을 물질적인 것으로 규정짓고 난 다음 성의 존재장소를 구체적으로 찾다보니 처녀막이라는 임의적인 신체부위에다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은 정신적인 것이다. 물론 성행동에는 신체가 관여하지만 그 본질은 정신적 현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 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는 등의 신체행동을 하지만 그것을 물질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행동도 신체행동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정신적인 행위다. 그렇다면 과거에 사랑하던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더럽혀진 것이고 버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정신 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상대방을 더럽히고 버리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정신이란 더럽혀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말그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그 사랑하는 감정을 행위의 차원에서 신체 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서로의 관계에 따라 신체표현의 정도는 달라야 한다. 서로 조금 가까운 관계라면 손을 잡는 정도 의 표현을 할테고 좀더 가까운 관계라면 서로 포옹하는 것까지 허용할테고 서로 더 깊이 사랑하는 관계라면 깊은 신체관계로 즉, 성관계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이때 성교를 하지 않더라도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고서 하는 모든 신체행위는 다 성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손잡는 것은 허용할 수 있으나 포옹한 것은 안된다거나 혹은 포옹하거나 키스한 것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거나 하는 말들은 인위적이다. 만일 성교가 나쁘면 손잡는 것도 나쁘고 손잡는 것이 괜찮다면 성교하는 것도 괜찮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성관계에 대해서 다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즉, 성관계는 정신적인 행위이므로 누구하고나 아무하고나 언제나 어떤 정도로 해도 윤리적으로 괜찮은 행동인가 ? 라는 질문이다. 필자의 대답은 아니오다. 그러면 언제 어떤 형태의 그 리고 어느 정도의 성관계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 라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랑의 정도에 비례하는 만큼 서로의 동의하에 하는 성관계는 윤리적이다. 만일 사랑하지도 않는데 성관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이 고, 사랑한다하더라도 그 사랑의 정도를 넘어서는 정도로 성관계를 갖는 것도 비윤리적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는 성관계도 비윤리적이다. 그리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비윤리적이다. 예컨대, 결혼한 사람이 혼외정사를 하는 것같은 경우다.

결혼전에 가진 성관계가 배우자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일인가 ? 만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원해서 가진 성관계라 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관계는 정신적인 행위로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사이에 자연스런 행위이며, 그러한 사랑을 신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비윤리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다른 사람과 정신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새로운 사람과 정신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마치 한 사람과 서로 친해져 밀접한 관계를 갖다가 사이가 멀어지면 관계가 멀어지고 새로운 친구와 관계를 시작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하여

예전 사람들은 결혼을 왜 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왜 하느냐라고 묻는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답이 맞든 틀리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다른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대답이 되었던 것들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문에 대해선 새로운 대답이 요청된다. 만일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옛날에는 결혼을 통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다. 가족을 재생산하고 거기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물질을 확보하고 자식을 낳아 노후를 보장받는 등의 목적이다. 그리고 생리적 목적과 심리적 목적도 한 몫을 해왔다. 즉, 성을 해결하고 가족간의 유대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가족의 경제적 기능과 생리적 목적은 많이 퇴색했다. 왜냐하면 가족을 갖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안정마저도 더 이상 그렇게 매력적인 요소가 많지 않게 되었다. 가족관계가 점점 소원해지고 가족을 통해 얻는 심리적 이익보다 부담이 더 커지고 부부간의 관계도 안정감보다는 갈등적인 요소가 많아졌고 자식으로부터 얻는 심리적 안정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식을 잘 키울 수 있는 자신감이 줄어들면서 자식을 갖는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그리고 부담으로 바뀌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결혼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지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행해져왔기 때문에 물리적 관성력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깊은 생각없이 그냥 해왔던대로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차츰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날 테고 그러면 언젠가는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지도 모른다. 사실 서구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오래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

결혼의 의미에 대해 묻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주지 못하면 인류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큰 기둥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겠다. 나는 결혼을 찬성하는 쪽에 서 있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 나름대로 답하고자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실현시 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맨몸으로 태어나지만 가슴 속에는 저마다 사랑을 가득안고 태어난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응답되고 받아들여지리라는 신뢰를 안고 나온다. 그런데 만일 그런 기대와 믿음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에게 가족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면 이 세상은 정말 엄청난 충격으로 와 닿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받아줄 것이라 믿고 계단에서 뛰어내리는데 어머니가 그냥 쳐다만 보고 있다면 아이가 어떻게 될까 ? 아마 아 이는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불구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아마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키우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고 차가운 곳으로 죽음의 땅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을 통해 응답될 때 살아나고 꽃필 수 있다. 응답되지 않은 우리의 사랑은 금방 상처받고 시들어 죽어버린다. 우리가 친구가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 이 활활 타오르고 밖으로 뿜어져 나와 세상을 따뜻하고 훈훈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이웃들의 따뜻 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가족은 이러한 사랑을 가장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유지시켜 주는 장이다. 그것은 가족이 혈연으로 맺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 가족은 이 사회를 밝게 따뜻하게 유지시켜주는 꺼지지 않는 용암의 원천과 같은 곳이다. 가족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웃으로 사회로 갖고 나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게 된다. 만일 가족이 없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자랄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상상이 안된다.

한편, 가족은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필요하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자라지만 또한 사랑을 나누어주면서 행복해지고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게 되는데, 만일 가족이 없다면 어디에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 줄 것인가 ? 우 리가 힘들게 일해서 일구어낸 열매들을 누구를 위해서 쓸 것인가 ?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도 그 사랑을 나누어줄 가족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정성은 그저 무의미한 몸동작에 불과해진다.

우리의 가슴마다 가득한 사랑은 밖으로 표현되면서 아름답게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게 된다. 만일 그것들을 안으로만 가두어 두 면 마침내 시들고 병들게 된다. 우리의 사랑을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그리고 불우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에 있다. 그런데 가족은 우리의 사랑을 가장 많이 가장 깊이 가장 오랫동안 조건없이 나누어줄 수 있는 관계다. 결혼은 바로 그 런 가족을 형성하기 위한 의미깊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와 너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가 발견해낸 가장 위대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출처 : 부산디지털대학교상담심리학과
글쓴이 : 김경호(0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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