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윤은혜적 인물형의 호소력 / 이영미
대중예술 스타의 매력은 그 시대의 소산이다. 그 이미지를 수용자 대중이 선택함으로써 스타는 탄생한다. 따라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스타는, 그 시대 대중들의 취향과 사회심리의 응집체이다. 여주인공만 보아도 그렇다. 1950년대 남자에게 버림 받고 어린 자식과 허덕거리다 결국 자식까지 버리고 피눈물을 쏟는 눈물의 여왕 전옥 스타일의 인물형, 1960년대 ‘잘 살아 보세’의 시대에 남자 열 몫을 해내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게 과묵하고 현숙한 이미지의 최은희적 인물형, 1970년대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철부지거나 백치 같아 보이는 순수 이미지의 안인숙 혹은 정윤희적 인물형 등은 각기 그 시대 대중들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올해 나는 윤은혜적 인물형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드라마 〈궁〉을 통해 완성되고, 최근 〈포도밭 그 사나이〉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이 인물형은 바로 이전 시대를 풍미한 인물형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 인물형은 한마디로 어리바리, 좌충우돌, 대략난감이라 하면 적확할까. 이전의 여주인공에 비해 느낌이 (나이가 아니라) 훨씬 어린 철부지 강아지 같다. 일찍이 〈낭랑 18세〉의 한지혜로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국민 여동생’ 문근영을 거쳐 드디어 윤은혜에서 완성된 듯한데, 방영 중인 드라마로 보자면 〈소문난 칠공주〉에서 신지수가 맡은 막내 종칠이도 같은 인물형이다.
이전 시기는 아주 달랐다. 1990년대 초반 〈질투〉와 〈그대 그리고 나〉에서 상큼 발랄하게 직업과 결혼생활을 모두 성공시켰던 최진실 인물형으로 시작하여,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며 남성적 씩씩함을 과시한 신은경 인물형을 거쳐, 야망을 위해 독하게 매진하는 인물이거나 고집 센 악동 분위기의 하지원, 전지현, 김정은 같은 인물형으로 이어져왔으니 말이다.(물론 구제금융 경제위기 때 불치병으로 쓰러지는 송혜교, 손예진 같은 복고적 청순가련형이 선호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윤은혜적 인물형에는 이전 시대 여주인공들이 지닌, 성공을 항한 독기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적 강인함이 없다. 무엇인가를 향해 매진하지 않는다. 그들의 운명은 남에게 떠밀려서, 우연히 혹은 충동적으로 결정된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잘 설명하지도 못한다. 김지미, 문희 세대처럼 수줍어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어서이다. 그냥 ‘대략난감’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만들어내는 삶은 방향성 없이 그저 부산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삶에 별로 자괴감도 없다.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당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나 세상에 떠밀려 스스로 패배의 길을 선택할 때에 자괴감도 생기는 법이다. 이들은 당위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맺힌 것도 없다. 곤경에 빠졌을 때에도 심각한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윤은혜나, 시어머니에게 당한 게 속상해도 그때뿐, 금세 신랑과 낄낄거리는 속없는 종칠이를 생각해 보라. 꿈 같은 것을 안 키우니, 희망도 없고 걱정도 없다.
이제 여자가 그다지 독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이 나아진 것인가?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등바등해봤자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모두 알아버린 이 여자애들을, 세상에 (특히 남자들의 세상에) 위협적이지 않을 귀여운 국민 여동생 이미지로만 즐기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 읽혀져 답답하다. 세상에 희망이 없으니, 꼭 자기처럼 희망도 없는 철부지 여동생 귀여워하는 낙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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