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심리학에서 보는 <정신병리>
융이 초기에 이용한 연상검사를 통한 심리연구는 각종 연상 작용의 장애 원인이 무의식의 감정으로 강조된 ‘컴플렉스’ 때문임을 발견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바로 ‘컴플렉스’가 결코 정상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정신병리현상을 보는 융의 입장은 정신병리를 건강한 사람의 심리의 바탕위에서 보고자 한 점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노이로제 환자의 심리가 다른 건강한 사람의 심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전제를 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그 당시 정신의학의 주류(정신질환은 뇌의 병 : 유전이거나 뇌에 병변이 있는)와는 다른 입장에 선 것이다.
융은 가능한 한 공식과 체계를 피하였고, 그것은 개개인 심리의 다양성을 ‘일반화를 강요하는’ 이론으로 송상시키지 않으려 한 것으로 생각되며, 신경증과 정시분열증에 관한 논고에서 대략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신경증
신경증(Neurose)은 그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음의 고통이라고 융은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내가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하는 강박적 생각에 사로잡혀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자. 암이 아닐까 하는 공포와 강박적 관념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일소에 부칠 수는 없다. 그 고통은 그 환자에게는 극히 생생한 그리고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환자는 이러한 생각이 쓸데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에 시달려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런 생각만 없애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의사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뒤에는 그럴만한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연히 생겼거나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그 치료의 핵심이다. 왜 괴로워해야 하는지를 알면 우리는 그 괴로움을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고 그 괴로움은 오히려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노이로제는 내적인 해리, 자기 자신과의 분단이다.... 마치 파우스트가 ‘두 마음이 살고 있다. 아, 내 가슴에~’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이라고 융은 말한다. 노이로제는 그러한 인격의 분단 위기를 예감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 인식의 계기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노이로제는 바꿔 말해서 일종의 자기소외의 결과이다. 자아(ego)가 자기(self)와 멀리 떨어질수록 인격의 해리를 일으킬 위험은 커진다. 그러나 노이로제의 고통은 바로 떨어져나간 자기 자신을 되찾고 인격의 해리를 지양하여 하나인 자신으로 통일되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노이로제가 하나의 인격의 해리이며 이를 재통합하려는 목적을 지닌 보다 높은 성숙에의 시회라면 이러한 해리의 예를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것은 의식의 일방성과 관련된다. 자아의식이 전적으로 외부사회와의 순응에 치우칠 때, 다시 말해서 외적인격 ‘페르조나’와 동일시할 때 그는 내적인격을 도외시하여 내면세계 즉 무의식의 지나친 대상작용에 직면하여 일시적인 의식상의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갱년기의 여러 가지 정신적 장애 - 특히 우울증은 흔히 강박적이고 철저한 성격의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며, 이들은 대개 사회생활을 착실하게 하고 사회 도덕규범을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으로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아내로서 가장으로서 각기 완벽하게 봉사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 가족, 직장의 기대와 사회적 평가에 철저하게 자신을 일치시켜오느라 자신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으며 그로인해 정신적인 균형이 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울증상은 의식에서 이용할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의미한다.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고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세계가 큰 세력을 갖고 의식을 압박하기에 이르른다. 이때에 환자가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 자살관념 등은 자아의식이 한 단계 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아가 집착해온 사회적 평가, 객관적 기준, 사회규범의 한계를 느끼는 데에서 오는 절망인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반적 태도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경우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 직관 감각 등의 특수 기능 중 어느 한 우월기능과 과도하게 동일시할 때 다른 기능들이 소홀히 되며 인격해리의 위험을 겪게 된다. 따라서 노이로제의 증상은 무의식의 열등기능이 어떤 성질인가에 따라서 그 특징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외향적 합리형에서는 무의식의 원시적인 지각에 의하여 강박적인 쾌락충동에 사로잡혀 음주, 약물, 성적 탐닉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고, 이에 불쾌한 추측을 자아내는 원시적 직관 기능이 부과된다. 여기에서, 심리학적 유형은 융에 의하면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되거니와 타고난 유형과는 반대되는 교육이나 환경으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으면 그는 심신건강에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자의 개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살리는 것은 치료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그 작업은 쉽지 않은 작업이며, 이를 너무 기계론적으로 연결시켜 모든 개체에 적용하려는 것은 피해야할 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극히 비합리적인 설명 불가능한 구석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개성이란 심리학적 유형을 능가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정신분열증
1911년 ‘정신병의 심인론(心因論)의 문제’에 관한 강연에서부터 1959년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융은 정신병의 심인론과 꿈과의 관계, 신경증과의 차이, 정신치료의 가능성 등을 논하고 병원환경과 정신병의 경과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원형론이 확립됨으로서, 분열증 환자의 체험세계는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신화적 요소, 고태적 심성, 바꾸어 말해서 고태적인 자율적 콤플렉스의 체험이며, 주체는 신경증에서처럼 두 개의 대립되는 인격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콤플렉스로 분열된다고 말한다. 해가 둘로 쪼개지고 빛이 사방에서 번득이며 이상한 노인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달려가며 모든 환경이 이상해져서 이제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느끼는, 분열증 환자가 가끔 경험하는 세계몰락감은 다름 아닌 그 환자의 자아의식의 몰락과 위기를 알리는 징조로서 세계의 몰락과 창조를 그리는 묵시록적인 혹은 신화적인 표현이다.
물론 분열증 환자의 체험내용이 순수한 원형의 체험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개인적 무의식의 콤플렉스와 집단적 무의식의 콤플렉스가 뒤섞여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자가 훨씬 지배적인 노이로제의 경우와 다르다. 이른바 애정망상(erotic delusion) 속에서 우리는 원형적인 여성, 혹은 남성상의 개입을 볼 수 있다. 우연히 만난 길가의 남자, 또는 여자가 그러한 내부의 여신상 - 아니마 원형 또는 영웅상 -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환자의 전체자아를 흡수해 버린다. 강렬한 힘이 밖에 있어서 이 상상의 여인 또는 남성이 도처에서 자기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믿게 된다. 환자들은 이때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에는 정상적인 의식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무의식에 대결해야 하는 경우와 환자의 의식이 약하므로 무의식의 내용이 주는 영향을 막을 수 없는 경우를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리하여 융은 분열증에 두 가지 군이 있어 하나는 약한 의식을 가진 군, 하나는 이상하게 항진된 무의식을 가진 군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3) 분석심리학적 정신치료의 입장
분석심리학적 정신치료의 유일한 과제는 환자 개개인의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 개인의 무의식이 제시하는 의도에 따라 때로는 깊이 때로는 얕게 분석하게 되며, 때로는 의식화 과정을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 -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개성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분석심리학적 정신치료는 개성화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의 개성이란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합쳐진 하나의 전체이므로 이것을 실현시키는 작업이란 처음부터 ‘암중모색’이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치료자는 ... 개인적인 발전과정을 ‘함께 체험하는 사람’ 이다.” 치료자는 환자라는 미지의 인간과 마주 앉아 환자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인격의 미지 측면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환자의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환자 자신으로부터 알아본다는 말을 환자의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으로부터 알아본다는 말이며, 그런 뜻에서 꿈이나 무의식의 표현 내용을 살펴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치료자는 ‘함께 체험하는 사람’ 일진대 치료자가 자신의 문제를 모르고 있으면 이것은 직접 환자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또는 반대로 치료자는 환자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치료자 자신이 병적 생각이나 감정으로부터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대화의 과정에 참여해야하는 정신치료에서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이점은 다시 말해, 정신치료의 기술이나 방법보다 치료자의 자세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기술이나 방법보다 치료자의 자세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말은 기술이나 방법을 완전 무시하라기보다 절대시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개 나의 정신치료나 분석의 방법을 묻는다. 거기에 대해 나는 아무런 답을 해줄 수가 없다. 모든 경우에 치료가 다르다. 어떤 치료자가 어떤 한두 가지 엄격한 방법을 따른다고 한다면 나는 그 치료성과를 의심하게 된다. 문헌에서 사람들은 마치 사람들이 환자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려 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환자의 저항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치료적인 것은 환자로부터 저절로 자라나야 한다.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개인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 나는 모든 환자를 가능한 한 개별적으로 치료한다.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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