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보다 무서운 건 실체없는 불안감
- ▲ 한덕현·중앙대 의대 교수 (스포츠정신의학 전공)
선수들이 느끼는 압박감 또는 두려움은 스포츠 정신분석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불안(Anxiety)'이고, 하나는 '공포(Phobia)'이다. 불안은 뚜렷한 대상이 없는 반면 공포는 대상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최근 내가 심리 상담을 했던 골프 PGA투어 선수 A는 경기 후반부의 실수로 우승을 놓치는 일이 잦았다. 그는 하루 500번 이상의 드라이버 훈련으로 각오를 다졌지만 실패는 반복됐다. 그의 문제는 드라이버가 아니라 아이언 샷에 있었기 때문이다. A는 이 사실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이를 부인하고 드라이버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실패가 반복되면서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프로야구에서 처음 등판하는 투수 B에게 코치가 "마음 푹 놓고 던져"라고 해 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신 "저 타자는 몸쪽 공에 약하다"고 지적하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투수의 심리가 이유를 모르는 불안에서 명확한 대상이 있는 공포로 바뀌면서 그에 대한 대책도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경기 때마다 경기 초반 5~10분 동안 우왕좌왕하며 골을 먹곤 했던 것이 한국팀의 고질병이었다. 마찬가지로 코칭 스태프가 "정신 바짝 차리고 경기해"라는 식의 지시를 해봤자 선수들은 더 막막해지고,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 대신 상대 공격의 장점을 명확히 지적하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원인을 알면 막연한 불안이 공포로 바뀌고, 이를 컨트롤할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역대 월드컵에서 한국의 고전은 공포보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상대는 뭔지 몰라도 엄청 강한 것 같고, 우리는 꼭 질 것 같은 원인을 수 없는 심적 부담감이 바로 불안의 정체이다.
따라서 그리스전에 임하는 한국 선수들이 불안을 느끼느냐, 공포를 느끼느냐는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다. 그동안 한국 팀이 그리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따라 철저한 대비를 했다면 이미 막연한 불안감은 떨쳐버렸을 것이다. 심적 부담감이 그리스 선수들의 큰 신장, 낮고 빠른 위력적인 크로스 등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면 그동안 땀을 쏟은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